2026-08-08

무엇을 디자인하는가

이성균

"보통의 존재"

성균 | 이

ix-01-what-do-we-design

나는 제법 오랫동안 디자인 해왔지만, 브랜드 디자인(혹은 ‘브랜딩’)이 정확히 무엇을 디자인하는 일인지는 비교적 최근까지도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초기에는 로고를 만들어주는 일이라 생각했다. 기업이나 브랜드를 대표할 수 있는 멋진 로고를 만들고, 함께 사용할 컬러와 서체를 지정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요소들을 명함이나 인쇄, 사이니지와 웹사이트 등에 적용하면 하나의 브랜드 디자인이 완성된다고 여겼다.

시간이 지나면서 ‘브랜드 경험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등장했고 그것은 꽤 설득력 있게 들렸다. 로고 하나를 만드는 데서 그치지 않고, 고객이 브랜드를 만나는 여러 접점의 경험을 디자인한다는 의미로, 이는 내가 알고 있던 브랜드 디자인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개념처럼 들렸다. 이후 로고는 공간, 인쇄, 웹사이트와 영상 안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결과물은 더 정교하고 감각적으로 변했다. 이제 웬만한 브랜드 디자인 프로젝트에는 모션이 들어간다. 정지된 이미지 몇 장보다 브랜드가 실제로 살아 움직이는 장면을 보여주는 일이 기본이 된 듯 하다. 우리도 한동안 이 흐름을 따랐다. 결과물은 분명 예뻐졌고, 사람들의 반응도 좋았다. 매력적인 목업이나 잘 촬영된 결과들이 실제 해당 브랜드에 대한 인지도와 호감을 높였다.

그런데 브랜드 디자인의 의미를 찾으며 일을 계속할수록 고민은 줄기보다 늘었다.

'우리가 디자인하고 있는 것은 정말 브랜드일까. 아니면 멋지게 보이는 장면을 만들고 있는 것일까.'

이 고민은 채용에서도 느꼈다. 여러 해 브랜드 디자이너를 채용하며 수많은 포트폴리오를 봤다. 상당수는 비슷한 구조로 가령, 세 개의 핵심 가치를 정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컨셉을 만든다. 이를 다시 컨셉이 담긴 로고와 컬러, 서체를 정의하고 여러 목업에 배치한다. 작업은 매력적이었고 때론 완성도도 높았다. 그런데 가끔은 브랜드가 달라져도 비슷한 설명과 비슷한 구조가 성립할 것처럼 보였다. 브랜드 포트폴리오는 담긴 것은 무엇을 디자인한 것일까?

고백컨데, 이 현상은 지원자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우리도 그렇게 일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프로젝트 초반에 비전과 미션, 핵심 가치를 만들었다. 긴 시간을 들여 인터뷰하고 회의하고 문장을 다듬었다. 그런데 비주얼 개발 단계로 넘어가면 앞에서 만든 것들 가운데 핵심 가치 몇 개만 남았다. 비전과 미션은 제안서 앞부분에 있었지만, 실제 디자인을 선택하고 판단하는 기준으로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비전과 미션을 왜 만드는지 충분히 알지 못한 것이다. 관습적으로 전략·기획 단계에 있어야 할 것 같았고, 다른 회사도 그렇게 했으며, 프로젝트의 구조상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이 단계가 비주얼의 설득력과 정당성을 부여하기도 했으니, 이게 맞나 싶으면서 이게 맞다 믿었다.

작은 디자인 회사가 큰 기업의 비전과 미션을 만들어주는 것이 맞을까. 우리가 만드는 문장이 실제로 그 조직의 의사결정에 사용되는 것일까. 아니면 비주얼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재료로만 쓰이고 사라지는 것일까. 실제로 문제가 되기도 하는 것은 앞에서 만든 생각과 뒤에서 만든 디자인이 서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전략은 전략대로 그럴듯했고, 디자인은 디자인대로 멋졌다. 그러나 왜 이 전략에서 이 디자인이 나왔는지를 설명하려 하면 그 사이가 비어 있었다. 그 빈자리를 레퍼런스와 취향, 디자이너의 감각이 채웠다.

감각은 매우 중요하다. 취향도 마찬가지다. 디자인의 모든 선택을 논리만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감각과 취향이 무엇을 위해 사용되는지에 대한 기준이 없다면, 결과가 아무리 멋져도 그것이 그 브랜드에 맞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그때부터 브랜드 디자인의 문제는 결과물의 완성도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진짜 문제는 우리가 떠난 뒤에 드러난다.

프로젝트가 끝나고 로고와 가이드 파일을 넘긴 뒤, 고객은 새로운 상황을 계속 만난다. 새로운 서비스가 생기고,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고, 이전에는 없던 매체와 접점이 나타난다. 그때 고객이 스스로 무엇이 자기다운 선택인지 판단할 수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남긴 것일까.

파일은 남았지만 판단은 남지 않은 셈이다.

나는 브랜드 디자인이 한 번의 멋진 결과를 만들고 끝나는 일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만든 것은 적어도 프로젝트가 끝난 뒤에도 조직 안에서 더 긴 시간 작동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결과물과 함께 남겨야 할 판단의 기준은 무엇이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