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으로 ‘브랜딩’이 주목받으며 브랜드를 디자인하는 회사도 빠르게 늘고 있었다. 회사가 드물 때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구분될 수 있지만, 많아지면 결국 저마다의 경쟁력이 필요하다. 무엇이 경쟁력일지 그 방향은 다양할 수 있지만, 적어도 내가 무엇을 잘하고 다른 회사와 무엇이 다른지는 나부터 알고 있어야 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 질문에 분명히 답하지 못한 채 익숙한 방식으로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무엇을 디자인하는가. 이 질문은 회사를 오래 지속하기 위한 생존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먼저 오랫동안 해온 내 일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였다.
나는 개념을 이해하려 할 때 용어부터 정리하는 버릇이 있다. 브랜딩, 브랜드 디자인, 비주얼 아이덴티티, 브랜드 아이덴티티 디자인, BI, BX. 비슷한 듯 다른 용어가 많았다. 자료를 찾아보면 각각의 정의는 있었지만 회사마다 사용하는 의미가 조금씩 달랐고, 모두가 동의하는 하나의 정답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업계의 정확한 정의를 찾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하는 회사인지 스스로 분명히 정하는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브랜드 디자인’이란 말은 내게 너무 넓었다. 무엇을 뜻하는지 알 것 같으면서도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우리가 직접 디자인할 수 있는 영역인지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웠다.대신 내가 조금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덴티티’라는 단어다. 가만보면 우리가 해온 일을 정의해주는 것에 가까운 부분이 많다. 몇 달간의 작업과정이 끝나면 우리는 흔히 ‘브랜드 디자인 가이드’라고 부르는 문서를 고객에게 넘긴다. 그 안에는 로고와 컬러, 서체를 비롯한 여러 시각 요소가 정의되어 있고,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어떻게 사용하지 않아야 하는지가 정성스레 담긴다.
그런데 사용법만 담겨 있다면 그것은 단순한 규칙집과 무엇이 다를까. 정해진 상황의 사용법뿐 아니라 각각의 규칙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이전에 없던 상황을 만났을 때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는지까지 담겨야 이후에도 스스로 브랜드를 운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가 정의해서 남겨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내린 답은 아이덴티티, 즉 정체성이다.
우리가 정의해야 하는 것은 요소들의 사용법만이 아니라 그 선택들을 하나로 묶는 정체성이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브랜드와 아이덴티티의 관계도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직접 디자인할 수 있는 것은 브랜드 그 자체라기보다, 조직이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에 대한 정체성과 그 기준에 가깝다. 그것이 실제 제품과 서비스, 말과 이미지, 행동과 경험으로 반복되고 사람들의 인식 속에 쌓이면서 브랜드가 되어간다. 이것이 보편적인 정의인지, 업계에서 통용되는 정의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가 쌓아온 경험과 오랫동안 품어온 고민을 종합했을 때 적어도 나에게는 이 설명이 가장 맞았다.
이때부터 나는 우리가 직접 디자인하는 대상을 브랜드 그 자체보다 아이덴티티, 즉 정체성에 가깝다고 이해하기 시작했다. 정체성이라는 말은 내게 브랜드보다 훨씬 분명했다. 특히 사람으로 치환하니 더욱 그렇다. 멀리 볼 것 없이 나만 봐도 오랫동안 쌓인 선택의 경향이 있다. 좋아하는 옷과 색감, 자주 찾는 브랜드가 있고 지양하는 미감이 있다. 영화와 음식, 일하는 방식에서도 비슷한 선택이 반복된다.
물론 좋아하는 것의 목록만으로 한 사람의 정체성을 설명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 목록보다 선택이 반복되는 이유와 방식이다. 무엇을 좋다고 판단하는지, 무엇을 받아들이지 않는지, 서로 다른 가치가 충돌할 때 무엇을 먼저 선택하는지. 그런 판단이 오랫동안 쌓이면서 나다운 모습이 생긴다.
나는 이 분명함을 조직과 브랜드에도 대입해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