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만든 브랜드 디자인은 그 조직과 얼마나 연결되어 있었을까
조수용 님의 영상에서 브랜드는 브랜드 오너의 그릇만큼 만들어진다는 취지의 말을 들었다. 차분한 것을 좋아하는 리더가 이끄는 브랜드를 외부에서 화려하게 디자인할 수 있다. 처음에는 새롭고 인상적으로, 그래서 긍정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브랜드는 차츰 조직이 원래 익숙하게 선택하던 모습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였다. 무척 공감했다.
우리도 그런 경험이 있다. 그때는 그런 모습을 보며 고객이 디자인을 제대로 운영하지 못했다 생각했다. 어렵게 만든 가이드를 왜 지키지 않는지 아쉬울 때도 있었다. 그러다 반대로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문제는 고객이 가이드를 지키지 않은 데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만든 디자인이 애초에 그 조직과 충분히 연결되어 있지 않았던 건 아닐까.
특히 기억나는 프로젝트가 있다. 전체 과정의 절반쯤 지나 컨셉과 방향을 확인받고 세부 디자인을 진행하던 시점이었다. 그런데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중간 의사결정권자가 새로운 레퍼런스를 제시하며 지금까지 실무진과 협의해온 방향과 다른 피드백을 줬다. 그 결정권자의 피드백을 반영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었다.
문제는 지금까지 합의한 방향과 새롭게 제시된 의견 가운데 무엇이 더 맞는지를 판단할 기준이 없다는 것이었다. 왜 기존 방향을 유지해야 하는지, 혹은 왜 바꾸는 것이 맞는지를 설명할 언어도 충분하지 않았다. 결국 더 높은 권한을 가진 사람의 결정을 따르거나, 디자이너의 감각과 논리로 빈 부분을 채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우리의 전문성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우리의 안을 관철하는 것일까. 아니면 고객의 취향과 결정을 가급적 수용하는 것일까. 합쳐질 것 같지 않은 두 줄기를 하나로 이어 붙이고 싶었다. 어렵지만 브랜드 디자인에 전문성이란 그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았다.
결국 기준을 사람에게 두지 않기로 했다. 전문가와 고객 가운데 누가 맞는지가 아니라 무엇이 그 조직에 더 맞는지에 무게를 두기로 했다. 그렇다면 그 ‘조직에 맞는 것’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가
조직의 정체성을 리더 한 사람의 취향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조직이 지나온 역사도 있고, 구성원이 반복해서 경험한 일도 있다. 실제로 만들어온 제품과 서비스, 고객과 맺어온 관계에도 그 조직의 모습이 남아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리더십에서 시작한다. 거기에 정답이 있어서가 아니라, 무엇을 앞으로 이어가고 무엇을 포기할지 최종적으로 선택하고 확정할 권한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더십에게는 결론보다 결정하는 방식을 묻는다. 이 브랜드를 왜 시작했는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앞으로 어디까지 가고 싶은지, 무엇은 할 수 있어도 하지 않을 것인지. 여기에서 조직의 존재와 지향, 경계의 원형을 찾는다.
하지만 리더의 말을 그대로 정체성이라고 정의하지는 않는다. 외부와 내부의 자료를 살펴보고, 실무자에게도 묻는다. 리더십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 실제 조직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지는지, 반대로 말로 설명되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반복되어온 것은 없는지 확인한다.
그다음은 무엇이 지금 우리다운지, 무엇은 바꿀지, 서로 다른 가치가 충돌한다면 무엇을 먼저 선택할지를 리더십과 주요 실무자가 함께 이야기하는 자리를 마련한다. 지금까지 검증한 바로는 매우 중요한 자리다. 이 과정에서 실무자는 리더십의 판단 기준을 이해하고, 리더십은 현장에서 실제로 일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게 된다. 서로 다르게 이해하던 것과 이미 같게 생각하고 있던 것이 함께 드러난다. 우리는 발견은 도울 수 있지만 선택은 조직이 할 수 있도록 듣는다. 그래야 나중에 그것을 자기 기준이라고 말할 수 있다.
판단 기준과 표현의 원리
이렇게 발견하고 정렬한 정체성의 중심을 우리는 ‘아이덴티티 코어(Identity Core)’라 부른다. 아이덴티티 코어는 판단 기준이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지, 어떤 고객과 함께할지, 서로 다른 요구가 충돌할 때 무엇을 우선할지 결정하는 데 사용할 수 있도록 한 장으로 정리해 조직과 공유한다. 리더십이 매번 모든 판단에 참여하지 않아도 실무자가 먼저 이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중요한 것은 정답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기준으로 판단할지 서로 정렬되어 있다는 것이다.
정렬된 판단 기준은 너무 필요하지만 이것만으로 정체성을 완료하기는 부족하다. 신중함을 중요하게 여기는 조직이라고 해서 그 신중함이 반드시 절제된 화면과 낮은 채도로 나타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코어가 같아도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는 방식은 여러 갈래로 갈라진다.
그래서 표현의 기준과 원리가 필요하다. 우리는 이것을 ‘페르소나(Persona)’라고 정의한다. 페르소나는 친근한, 전문적인, 대담한 같은 핵심 가치 몇 개를 고르는 일이 아니다. 말의 온도나 정보의 밀도처럼 표현을 좌우하는 몇 개의 축 위에서 이 조직이 어디에 설지를 정한다. 그러면 문장의 길이와 이미지의 분위기, 화면의 여백처럼 서로 다른 선택도 같은 자리에서 설명할 수 있다.
이 둘을 바탕으로 이름과 메시지 같은 버벌 에셋, 로고와 컬러, 서체, 이미지와 그래픽 같은 비주얼 에셋을 만들고 웹사이트와 공간, 인쇄물과 영상, 제품과 서비스 같은 실제 접점의 경험으로 이어간다.
우리가 떠난 뒤에 남는 것
이 과정에서 우리가 지키는 원칙이 하나 있다. 없는 것을 억지로 만들지 않는 것이다. 조직의 비전이 분명하지 않다고 그럴듯한 문장 채우는 것보다, 아직 분명하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편이 낫다. 억지로 채워진 정의는 문서 안에서는 완성돼 보여도 실제 조직에서는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에게는 그럴듯한 정의보다 실제로 작동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실제로 작동해야 쌓이고 그래야 조정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래 일해왔다. 이제는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통할 것 같아서, 설득될 것 같아서가 아니라 정말 필요하다고 믿는 일을 하고 싶다. 그리고 이 방식으로 일하기 시작한 뒤로 프로젝트가 눈에 띄게 달라지고 있다. 맞다고 생각한 방식이 현장에서도 작동한다는 확신이 생겼다.
우리는 이 일을 아이덴티티 경험 디자인(identity experience design), 줄여서 IX라고 부른다. 정체성을 발견하고 정렬해 판단의 기준과 표현 원리로 만들고, 그것을 실제 경험으로 이어지게 하는 일. 우리가 떠난 뒤에도 조직이 스스로 자기다운 선택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는 일. 그런 선택과 경험이 시간 속에 쌓이면서 브랜드가 되어간다고 믿는다.
매뉴얼 그래픽스는 IX를 전문 스튜디오다.